보도자료
치매주간보호센터-치매체험수기 최우수상 "가시고기의 사랑"
- 작성일
- 2011.11.22
- 조회수
- 577
가시고기의 사랑
장 경 진
저는 푸른 잎이 우거지고, 통나무 산책로가 멋진 청량산 아랫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햇살이 넉넉해서 노근노근 해지는 오후,
저는 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의 벚나무 그늘 아래서 임을 기다리듯
한껏 고개를 빼고 모퉁이를 돌아올 노란버스를 기다립니다.
4시30분 즈음.
노란버스가 전조등을 깜박이며 모퉁이를 돌아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늘 정중히 인사해 주시는 중년의 기사님과,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선생님,
그리고 지팡이를 앞세운 아버지가 조금 불편한 걸음으로 차에서 내리십니다.
“안녕 하세요~ 어르신이 식사는 잘하셨는데, 오늘은 소파에 앉으셔서
중심을 잘 못 잡으시고, 걸음도 많이 불편해 보이셨어요~“
선생님의 걱정 어린 눈빛과 말씀에서 오늘 아버지의 컨디션이 많이 좋지
않으셨다는 것을 금세 느낄 수가 있었지요.
“아버지~ 몸이 많이 불편했어요?”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시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십니다.
“어르신~ 푹 쉬시고, 월요일에 뵐게요~ 주말 잘~보내세요” .......
그렇게 노란버스를 뒤로하고,
여든넷의 가냘픈 아버지는 제게 온몸을 의지하며 천천히 걸음을 떼십니다.
사진으로 뵌 시어머님은,
생활력은 강하셨지만 몸이 약하셔서 10년 가까운 긴 투병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50세쯤 되셨을 때,
아버지 곁에 다섯 남매만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사교성도 없고,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님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가부장적이고 고루하신 분이셨다는데 어머님 없이 어떻게 다섯 자녀들을
키우셨을까? 홀로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 버거우셨을까 싶건만,
어미 잃은 새끼에게 제 살점까지 아낌없이 내어준다는 가시고기처럼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다섯 남매를 바르고 성실하게 키워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큰 나무 같았던 고마운 아버지는 무심하고 야속한
세월 앞에 모래성 무너지듯 너무 빨리 기력이 쇠해지셨고 2006년 봄.
그 점잖고 자존심 강하시던 분이, 알츠하이머 치매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기도 하셔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가끔은 날씨와 상관없이 컨디션이 들쑥날쑥 할 때도 많은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주변 분들에게 폭언이나 무례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셔서
저를 당황하고 난처하게 할 때도 있고, 고집이 세지고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아 진땀을 흘리게 될 때도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의 기력이
떨어지는 것에 비해 식사나 소화도 잘 하시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
말에는 대부분 수긍하시며 ‘그래~그래~’ 하고 잘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6.25때 이북에서 피난을 오신 실향민 이십니다.
가끔 제가 고향에 대해 물을 때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흥분된
“어젯밤에 고향에서 오마니가 잠깐 다녀 가셨드랬디~ ” 하며 좋아하시고,
고향에 있는 그 많은 사과나무를 어떻게 관리할까도 걱정 하십니다.
요즘 아버지의 목표는, 이북에 있는 과수원에 남한의 튼튼한 콘크리트를
가져가서 번듯한 물받이 고랑을 만드는 것인데, 곧 고향 가시면 과수원을
좀 팔아 제게도 한몫 주시겠다며 목에 힘을 주시곤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꼭! 과수원 팔아서 아무한테도 주지 말고, 나만 한몫 챙겨 달라“며
손가락 걸고 아버지께 다짐을 받아내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니, 형님들이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무서운 호랑이셨다고 하던데
늘 덜렁대고 실수투성이였던 제게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시고 언제나
차분하고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거 같습니다.
신혼 초, 그때는 왜 그렇게 밥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밥을
시커멓게 태워서 식사 때마다 매캐한 탄 밥을 드리거나 누룽지를 드려도
아버지는 얼굴한번 찌푸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자상하고 인정많은 분이기도 하셨지요.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았는데도,
일상을 더 갑갑하게 여기며 우울하고 예민해져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과도 원만하고 친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제가 자처한
착한여자 콤플렉스로 모든 걸 혼자 해결하며 삭히려고 했던 것이 저와
가족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던 거 같습니다.
이런저런 갈등과 어려움 속에서 서울 큰형님이 아버지를 모셔 간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노인정에 가시던 아버지가 빗길에 넘어져 대퇴골절로 큰
수술을 받으시고, 장기요양이 불가피하게 되면서 아주버님은 저희에게
어려운 결심을 말씀 하셨습니다.
‘효도가, 부모와 함께 살며 모셔야만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아~
세상도 많이 변했으니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아버지를 모시자’며 전문적인 치료를 할 수 있는 한적하고 공기 좋은
시설로 아버지를 모실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뜻밖의 말씀이셨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아주버님의 말씀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과, 아버지가 서울로 가시고 난 후 맞벌이를 시작했던 저희도
이런저런 경제적 이유와 여건과 핑계로 아주버님의 뜻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했고, 다른 형제분들과 그이도 서서히 마음을 굳힐 때 쯤.
저녁을 먹고,
그이와 산책을 하며 공원을 거닐다가 벤치에 앉았습니다.
맑은 밤공기와 까만 하늘의 소박한 별들이 막막하고 혼란스러운 저에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지요.
“나… 무섭고 겁나고..... 많이 두려워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뜬금없는 내 말에 그이는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나는 평생을 후회하며 살꺼예요.
그래서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아버지를 모셔야겠어요.
당신이 나를 좀 도와주세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 말에 그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어느새 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정을 하기까지 여러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아파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납니다.
사랑하지만 두렵고, 싫었지만 좋아하고, 돌아서고 싶지만 그리웠던 아버지.
저를 버겁고 힘들게 하셨지만, 관심을 기울여 정성껏 보듬지 않으면 그
아픔이 오래가서 잘 낫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금세 덧나버리고
마는... 그때 아버지는, 제가 보듬어야 할 저의 ‘생인손’같았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말에 그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당신한테 미안해…….그리고 고마워…….” 어두운 공원 가로등
밑에서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그이도 나처럼 울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다시 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차근차근히 했습니다.
그러나 요양시설에 계신 아버지가 거동은 조금 나아지셨지만, 대인관계가
지인을 통해 연수구에 치매 어르신들을 위한 ‘주간보호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에게 기적 같은 희망이 생겼지요.
저희는 부랴부랴 아버지를 모시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상담을 했고,
입소가 결정되면서 아버지를 저희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곳에서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즐겁게 계실 수 있음은 물론이고, 전문적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치매어르신께 체계적인 돌봄 서비스를 하는 저희와
아버지께는 꼭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끔하게 수리된 저희 집으로 오시던 날,
“아버지~ 이제 우리 서로 상처 주지 말고, 사이좋게 잘~ 살아요~”
“응…….” 아버지는 여전히 담담하게 대답하셨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저는 예전의 의무와 형식에 얽힌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아닌,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다시 아버지와 저의 동거는 시작 되었지요.
물론 힘들고 버거운 날엔 다시는 안볼 사람들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며
‘난~ 아버지 때문에 못살겠어~!’하고, 아버지도 ‘나도, 너 때문에 못산다!’
하시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의미 없는 말들을, 맘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것을 서로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기셔서 주변 분들을 곤란하게 하실 때도 있지만, 치매진단을 받으시고
요양시설에 계셨던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자기표현도
하시는 지금의 억지스런 아버지의 모습이 저를 괜스레 웃음 짓게 합니다.
또, 주간보호센터 에서는 한 달에 한번 보호자 가족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가족모임에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할 치매에 관한 의학적 지식과 더불어
웃음치료와 생활 공예도 배우며 보호자가 심리적으로 안정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과 배려도 아끼지 않고 해 주십니다.
치매어르신을 모시다보면, 여러 가지 당황스럽고 곤란한 일들로 좌절하고
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이 치매어르신의 부양을 아들이나, 며느리, 딸이나
배우자등 누구 한사람 또는 어떤 한가정의 희생과 책임처럼 생각하고
수수방관하는 자세라며 어려움을 토로하곤 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오신 그분들의 치매는 대상자뿐
아니라 그 가족도 슬프게 하는 서글픈 질환임에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그분들은 우리와 가족모두에게 더 충분히 사랑받고, 마땅히
존경받고, 따뜻하게 보호받으며, 진심으로 위로받으셔야 하지는 않을까요?
물론, 가속화되는 고령화시대에서 노인성질환의 복지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할 큰 숙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가족구성원 모두의
꾸준한 관심과 참여가 우선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아바이~ 목욕합시당~”
오늘 아침에도 다른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행복합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가정적인 그이가 있고, 믿음직한 큰아이는 올해
결혼생활 2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면, 사랑하는 가족이 다 함께 있는 지금이
저에겐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날인거 같습니다.
제 손을 꼭 잡은 아버지를 이제는 놓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저를 묵묵히 사랑해 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제가 아버지의 단짝이 되어 아버지 곁에 늘 있겠습니다.
사랑해요~ 아버지.
과수원 팔면 꼭 제게 한몫 주셔야 되요~^^
*2011년6월26일 늦은밤
청학동에서 못된 며느리가-
P.S: 글을 쓰는 내내 아버지가 제게 주셨던 사랑을 다시 한번
되새겨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